미국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준엄한 심판이 있었습니다. 하원의 승리는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상원 결과가 놀랍습니다. 텍사스, 캔자스, 아이오와, 오하이오 등 공화당이 굳건히 지켜온 지역에서조차 판세가 뒤집혔습니다. “블루 웨이브”를 넘어 “블루 쓰나미”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캔자스에서는 94년 만에, 텍사스에서는 38년 만에 민주당 상원의원이 탄생하는 셈입니다. 먼저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에 축하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번 승리가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합리성과 신뢰성을 복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패색이 짙어지자, 트럼프는 자신의 SNS에 “내 이름이 투표용지에 있었다면 압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8월엔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척 투표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길게는 백 년 가까이 공화당의 아성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책임은, 악몽과도 같았던 트럼프의 2년 간의 실정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번 중간선거를 판가름한 것은 이른바 ‘어포더빌리티(affordability)’였습니다. 우리 말로 의역하면 장바구니 물가였습니다. 여기에 이란과의 전쟁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란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유가가 치솟았고, 전쟁 전 갤런당 2달러 후반이던 미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4달러를 넘어섰습니다. 9월 물가상승률 3.7% 가운데 절반 이상이 휘발유 값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동맹국에 무분별하게 부과한 관세가 수입 물가를 자극해서 자국민의 생활비를 끌어올렸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미국인의 삶을 나아지게 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기름값이 치솟고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습니다. 실제로 이번 선거의 NBC 출구조사에서 유권자 80%가 물가 때문에 생활이 어렵다고 말했고, CNN 출구조사에서는 무려 74%가 이번 투표 참여의 요인이 ‘이란전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는 혐오정치, 국제규범을 무시한 주권국 침략, 동맹을 겁박과 갈취의 대상으로 삼는 ‘조폭 외교’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미국 헌법의 설계자들은 하원 임기를 2년으로 짧게 정했습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강해도 2년마다 평가를 받도록 했습니다. 너무 선거가 자주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치에 교정의 기회를 주는 ‘알람시계’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먼저 민생을 지키지 못하는 정권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Affordability, 즉 ‘장바구니’의 문제는 현재 세계적으로 동시 분출되고 있는 민심의 분노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도 유럽도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트럼프가 일단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지난 행태를 보면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선거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압박과 청구서를 더욱 들이밀 수 있습니다. 관세협정, 대미 투자, 안보 관련 이슈들을 재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백악관 한 곳만 바라보는 일변도 외교는 안 됩니다. 중간선거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외교에 대한 대통령의 권력은 여전히 강하게 유지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 의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사청문회, 대사 인준, 국방수권법, 예산을 통해 동맹 정책의 큰 틀을 좌우합니다. 상·하원과의 정례적인 교류 채널을 구축하고, 민간 네트워크를 넓혀 대미 외교의 기반을 다변화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