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지역언론인 모임인 '세종포럼'은 24일 프레스센터에서 정의화 국회의장 초청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기조연설과 일문일답을 첨부합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 의장은 이날 개헌, 선거구제, 김영란법, 차기 대선 시대정신과 차기 대통령 덕목, '임을 위한 행진곡' 등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일시 : 3.24 11시 장소 :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
기조발제 :
정치라는 것이 결국 국민에 대한 사랑을 가지면 되니깐 의사와 정치가 그런 점에서 닮은꼴이 있는 것 같음. 의사는 인본주의, 정치는 민본주의 그런 점에서는 같다.
의사는 기술이 있으니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 수 있으니깐 그 점이 좋고 국회의원과 정치인도 사회의 약자나 어려운 분을 위해 법도 만들고 현장에 가서 위로도 하고 의정활동에 하는 것 따지고 보면 의사가 정치에 맞을 수 있다라고 혼자 위로를 해가면서 살았음.
의장이 될 때 까지는 자취생활 19년 세월을 혼자서 자취 생활하는 공무원은 없을 것임
한 지역구에서 한 정당으로 5번 당선된 사람이 서청원 대표님 들어오기 전 까지는 제가 유일했음. 비례대표나 재보선으로 재외하면 한 지역구 한 정당은 저밖에 없다 기록이라 생각함
33살 때 의사로써 기본적 공부 끝냄. 78년도에 신경외과 전문의사 되고 미국에서 3년 의사생활과 연구를 하고 돌아와 부산의 봉생병원 운영했음. 작은 유에서 큰 유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70병상의 병원으로 시작했음.
74년도 12월 대왕코너 화재로 원장이 돌아가심. 그 때 병원을 맞게 됨. 제 자랑 갖습니다만 상속세가 3억정도 90% 방위세가 5%해서 95%를 내면 살아나는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봉생병원은 망한 것. 돌아가시기 한달전에 혼인신고를 했었음. 이후 제가 이를 맡아서 첫 4년은 전문의사 될 때까지 소득세 상속세 내고 했는데 지금 병원은 장례식장 말고는 이익이 될 때가 없다 하였지만 그때는 그것이 아니었음.
지금 직원이 1100여명 됨. 문화사업과 복지사업 1200명 정도가 됨. 처가집이 망한 것을 다시 세웠다는 것과 일자리를 1000개 이상 만들었다를 자랑스럽게 생각함. 제가 원훈을 4가지인데 그 중 하나에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있음 제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을까 싶은데 자랑스러움. 병원에 존재 이유가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병원이다라는 생각을 그 때 했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그때부터 생각했음 여러분들 처음 뵙지만 자랑하고 싶음. 그것이 봉생문화재단과 복지재단 만드는 시발점이 되어 96년에 15대 국회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음. 그런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이 없음. 김성 선생님도 와 있지만 광주일보 정치부 차장 때 만남 봉생문화재단과 금호문화재단 교류한게 부산과 광주의 영호남 화합으로 발전.
국회의원 되고 난 뒤에 시작했으면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국회의원 전 91년 즉 5년 전부터 시작을 했던 것임. 지금 증인이 계시지만 96년 국회에 들어오니 그때 이어져 오다가 97년 말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되고 흐지부지 되었었음. 그것을 저는 매우 싫어하여 혼자서 줄기차게 광주 근처 가서 시간나면 만나고 그렇게 했음. 그것이 그 맥을 제가 혼자서 이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님. 세월이 지나 다시 양쪽에서 열심히 하여 지금이 되었음.
맹자에 보면 고자가라는게 있음 이완구 총리 인사왔을 때 이야기 했지만 당신은 큰 사람으로 더 큰일을 하기 위해 하늘이 당신에게 고통을 준 것. 뼈마디 살을 에리는 듯한 고통을 준다는 것임.
저에게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이 되기 전 시련이 있었음. 하나는 시국사건 82년 3월 전경에 방패로 찍혔다. 나는 그것이 아니다 넘어져 다친 것이다. 그해에 국정감사에 불려도 갔음 93년도에 민노총인데 병노련 제가 세컨드 병원 만들고 난 뒤인데 처음 병원 만들면 5년 동안 흑자 안됨. 응급시설에 한명이 와도 팀이 있어야 함.
옛날 박관용의장 지역구에 동래봉생병원 만들었음. 사람들이 해운대 동래로 이사가니 동구에 처음에는 50만 제가 처음 출마할 때는 18만 지금은 10만인데 미래를 봐서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는 곳에 만들었음.
3년도 안되어 병노련이 만들어져 2달 정도 뒤부터 극심히 어려웠음. 당시 의정부에 작은 병원과 부산에 동래봉생병원에 있었다고 함. 재선 때 재경위원회를 했는데 심상정 신계륜 두분이 동래봉생병원을 알더군요. 노조 때 지원을 하러 갔다는 것임. 1층부터 지하3층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그랬음. 한 5개월 겪으면서 피눈물 흘림. 자기가 뜻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결국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오너가 받는 충격은 크다. 그때 포기하려 했음.
노동운동과 관련 시국사건에 한번 있었음 제 이름이 의화인데 저인들 인간인데 완벽할 수 있는가 가능한 중재하려고 애를 씀 화합하려고 애를 써왔음
지난번 시진핑 주석이 왔는데 특별이 할 이야기도 없고 해서 주역에 맨 첫 번째 건괘가 나오고 다음에 곤괘가 나오는데 거기에 의로써 화를 이루면 무엇이던 해결할 수 있다 라는 말이 있어 써먹었음.
이 작은 땅에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것만 해도 가슴이 터지게 아픈데 동서가 또 갈등을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어 제가 나섰는데, 그 계기는 전주예수병원에 레지던트를 2년 하면서였음. 부산에서 왔다하면 당시에 다들 안 좋게 이야기함.
당시에 전북을 가보니 사람들이 전통 보전하고 근검 절약하는 등 장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음. 이것을 알려야겠다 해서 전문의사가 된 뒤에 활동함.
분열로 가서는 안 되고 통합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은 이런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막상 정치를 하다보니 그것만으로는 안된고 생각했음.
제헌절 때 이야기했지만 소선거구제로는 안된다. 51과 49가 대립하고 51이 다 먹으려 하는 것처럼 중대선거구제 권역별 비례대표 석폐율이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음.
사실 초재선 때 그런 생각 못했음. 초재선들이 정치적 발언을 요즘에 많이 했지만 제가 초선때는 양당제가 맞고 4년 중임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 3선 이후에 바뀌었음. 사람으로서 나이가 많아지면서 많이 성숙해지듯 생각도 바뀜 옛날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많이 느끼고요.
제가 중대선거구제와 석폐율은 3선이후에 보니 대한민국이 하나의 통합된 사회로 가기 위해 이것이 필요 요즘 독일식 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 의장 끝나면 연정에 대한 정치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음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국민들의 의사가 가능한 한 100% 의사당에 전부 수립이 되어 소위 말하면 지지고 복고 대화하고 타협하고 논쟁하는 것이 필요함. 정치라는 것은 말임, 말로써 정치를 하고 국회 안에서 모든 국민들의 생각을 수렴해야 한다고 생각함.
현재 교섭단체의 경우는 20석이 필요해 작은 정당은 살아날 방법이 없음. 그 정당이 지지도를 10%받아도 20석이 안되면 교섭단체가 안되니 문제가 있음. 저는 이제 교섭단체도 10석으로 줄여야 한다고 생각함.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의견이 국회에 수립이 되는 용광로가 되어 몇 번의 토론을 거침으로써 쇳물이 나오듯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한민국의 대의민주주의 앞당기는데 도움 될 것.
내년 선거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당제가 되었으면 좋겠고, 10석 이상 가지면 교섭단체가 되었음 좋겠다. 의장이 그런 생각한다고 되는건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기사를 통해 알리는 것. 양당제가 분열과 갈등으로 가는데 비해 이제는 통합으로 가야한다고 봄. 힘들기는 하지만 통합되지 않고는 대한민국이 살 길은 없음.
외국 몇 번 다녀왔음. 사람들이 의장 따라 안가겠다는 생각 들 정도로 타이트하게 일정이 돌아감. 현재 우리는 코끼리 4개의 다리 사이에 껴있는 지정학적인 운명임.
AIIB, 사드 문제 등 지정학적인 문제로 인하여 우리 외교가 매우 중요함. 외교력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 것임.
미얀마에 규모가 중국에 버금가는 홀을 지은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인데, 큰 나라 사람들과 작은 나라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다름. 우리는 섬세하고 작은 것 좋아하는데 베트남도 국회의사당 건립 후 최초로 초대받아 가봤는데 중국의 전인대 들어간 느낌이었음.
우리의 운명이 그렇기 때문에 외교에 조금 더 투자해야함. 예산도 너무 작음 0.88%인데, 이것저것 빠지면 남는게 없음. 제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