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7주년, 내란과 작별하고 민주주의로 나아가자
"여기(강정마을)서 서귀포 가는 것도 저 계엄령 때는 10시나 9시나 되면 못 갔어. 저거 또 4.3처럼 하려는구나. 막 겁나서 그날 못 잤어."
[정순희/제주4·3 피해자]
제주 4·3으로부터 어느덧 77년이 흘렀다. 따뜻한 봄날의 기운 한 편에 씁쓸함이 묻어온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으로 시작된 내란이 종식되지 않은 채 제주 4·3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자마자 발생한 제주의 계엄과 윤석열의 계엄. 77년의 시차에도 파시즘 논리와 국민을 향한 폭력은 그대로 닮아있었다.
제주 4·3과 윤석열의 12·3은 ‘빨갱이’와 ‘반국가 세력’이라는 미명 아래 폭력을 정당화했다.
1948년 10월, 이승만은 제주에 계엄령을 포고했다. 이승만은 치안유지와 사상검열이라는 미명으로 수많은 제주 시민들을 불순한 분자로 몰아 학살했다. 해방 이후의 정세와 맞물려 이승만의 ‘빨갱이 사냥’은 국민의 목숨을 무참히 빼앗을 논리로 둔갑했다. 2024년 12월, 윤석열의 계엄에서 똑같은 논리가 등장했다. 반국가세력을 척결한다는 궤변을 내세우며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윤석열, “빨갱이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끝을 보겠습니다!”라는 극단적 혐오로 추동된 서부지방법원 폭동, 2,3차 내란을 유도하는 극우 파시즘과 거기에 비굴하게 편승한 국민의힘 의원들까지. 비극적인 두 역사의 유사성은 제주 4·3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실체적 과정이라고 증명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또다시 무너졌다.
제주 4·3을 겪은 우리 국민들은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어서는 안된다는 합의를 만들었다. 제주도민의 1/3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이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 제주 4·3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계엄이 독재자의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계엄령 하에서 어느 순간 가족과 친구를 잃고 심지어 이름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12·3 계엄을 준비하며 시신을 담을 3천개의 영현백을 준비하고 체포한 이들을 가둘 지하 벙커를 확인했다. 계엄의 밤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를 장악하고 유리창을 부쉈다. 제주 4·3으로 만든 상식과 합의를 윤석열은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제주 4·3을 기억하며, 다시 단단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자.
민주화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자 국가 폭력의 참혹한 역사, 제주 4·3을 기억하자.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으로 국민에게 반국가 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마구잡이 학살을 자행해 온 역사적 트라우마를 답습했다. 여전히 작별하지 못한 제주 4.3의 아픔을 후벼 팠다. 77년이 흐른 지금,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책임으로 제주 4·3을 다시 마주해야 할 때이다.
내란수괴 윤석열 파면으로 제주 4·3이 남긴 우리의 책임을 다하자. 윤석열 파면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제주 4·3으로 고통받은 이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장에 모인 이들과 함께 파면 너머로 나아가자. 제주 4·3을 기억하며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재건하자.
2025년 4월 3일
기본소득당 청년·대학생위원회